장주

 

 

장주포대희는 천주의 포대희와 유사하며 그 기원도 같다. 하지만 후장 음악은 천주와 달리 나고, 쇄납 (嗩吶: 날나리) 등 북관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악기를 사용하면서 문희에서 무희로 발전하게 된다. 그 외에 장천 운소 (雲霄)조안 (詔安)동산 (東山) 평화제

(平和諸)현 등에서는 가까운 조주(潮州) 악곡의 영향을 받아 그 지역 포대희는 따로 조주포대희가 부른다.

20세기 초반 장주 지방 관리 남녀한(藍汝漢)은 상해에서 경극단을 불러와 이 지역에 널리 알렸다. 같은 시기 장주 예능인 양승장 (楊勝将)이 경극 창강과 연출을 포대희에 접목하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냈다. 1900년부터 1930년 동안 장주북파포대희는 타이완과 천주에서 유행한 남파포대희, 때에 따라서는 천주이원포대희와 서로 경쟁 하게 된다. 이후 북파포대희는 타이완으로 건너가 이천록 (李天禄 1910-1998 역주: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희몽인생은 이천록 선생의 인생 일대기를 다룬 영화이다.)의 외강포대희로 발전한다.

 


사진: 이천록 선생.

http://ltl.gac.ntnu.edu.tw/

추모 및 기념 공식 사이트 


1932년 타이완에서 발달한 가자희가 장천에 전해지면서 그 영향을 받아 원래부터 경극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던 장천자가희에 타이완가자희의 음악과 의상이 결합하여 향극(薌劇)이라 불리게 되었다. 장천포대희 중에서 향극을 모방한 일부 극단은 가자조의 노래를 넣어 포대희를 만들어 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개량을 거쳐 1950년대에는 유머 넘치는 무타(무술극)를 특징으로 하는 장주포대희의 성격이 확립되어 방침연의 (方針演義), 서유기 등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내용이 많았다.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국가가 포대희 보존을 주도하게 되었다. 19593월 장주 龍渓(룡계)에 용계전구목우극단 (龍渓専区木偶劇団)이 결성되어 민간예술이던 포대희가 전문예술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또한 1960년대 루마니아에서 열린 2회 국제조종인형축제에 장천포대의의 대명부 (大名府), 뇌만춘타호 (雷万春打虎) 가 상연되어 금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전통예능이 부정되어 10년 이상 정체기를 맞게 된다.


사진 뇌만춘타호 호랑이 잡는 내용인가 보다...아마도...


문화혁명이 끝난 후 개혁개방이 시작된 1980년대 중국정부는 다시 포대희의 보존을 시작해 장주목우예술학교를 설립한다. 장주목우극단도 다시 활동을 시작하고 국가1급연원(무형문화제 같은 것으로 보임) 장진화 荘陳華(1944-)와 젊은 홍혜군(洪恵君), 오광량 (呉光亮)의 노력으로 아동극 숲에서 벌어진 일 (森林的故事) 등이 상연되었다.

 

타이완 (台湾)

 

타이완에서는 천주에서 전파된 포대희가 타이완 전통문화와 타이완어를 만나며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어 현재까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1750년 복건에서 많은 이민이 타이완으로 이주하면서 포대희도 이민과 더불어 타이완으로 유입된다. 당시의 대본은 고서와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상연하는 포대희를 고책극 (古冊劇)이라 불렀다.

고책극의 특징은 구백이 문어체라는 점, 동작이 유연성, 남북관을 주로 사용한 음악 등이다.

타이완성 통지권(通誌巻)’ 학예예술편에 따르면 최초에 타이완에 전래된 것은 남파포대희였다.

현재 타이완에서는 방계가 된 남파이지만 현재 타이페이의 소서원(小西園), 역완연 (亦宛然) 등 소수나마 전해진다.

1920년대는 무협극이 중심인 포대희가 민간에 퍼진 시기이다. 청말, 중화민국 초반의 칠협오의 (七侠五義), 소오의(小五義) 등의 무협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각종 검을 사용한 표현을 중시했기 때문에 검협포대희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시 검협극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오주원의 황해대와 신흥각(新興閣)의 종임상 (鍾任祥 1911- 1980)이 있다.



사진: 신흥각 단장 종임벽 선생. 

신흥각 공식 사이트는 이 곳. 

http://taiwan-puppet.myweb.hinet.net/


1930년대 타이완에서 황국신민화 운동이 추진되면서 포대희도 변화를 맞게 된다. 우선 중국 전통 나고 사용이 금지되고 대신 서양음악이 쓰였다. 또한 세세하게는 일본풍 옷을 옷을 입은 인형이 사용되고 미토코몬등 일본의 스토리를 원작으로 일본어로 상연하게 했다.

경쾌한 구백을 특징으로 하는 포대희에 일본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 당시의 연출 방법은 금광포대희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금광포대희 金光布袋戱


전후 1950년대 타이완 중남부의 야외극으로 금광극이 등장한다. 무협극 시기의 무협 내용을 계승하고 새로운 분파를 만들어낸 금광극은 화려한 배경과 의상을 사용하고 무대조명을 이용한 특수효과를 많이 사용해 무협극의 정경을 표현해 냈다.

또한 음악에 있어서는 적잖은 수의 극단이 전통적인 후장 음악 대신 레코드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주요 인물로는 오주원 제 2대인 황준웅 (黃俊雄 1933-)과 신흥각 제 5대인 종임벽 鍾任壁이 꼽힌다. 황준웅 포대희는 인형 대형화를 실현하여 TV를 통해 방송을 시작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



사진 : 포대희의 로열 패밀리 ㅋㅋ 황가의 가계보. 

황해대씨 아들인 황준웅씨, 첫번째 부인 사이의 아들은 황강화, 황문택, 황문요씨.황강화, 황문택씨는 벽력 포대희

황문택씨와 황문요씨는 쌍둥이 형제인데 동생인 황문요씨는 황준경씨에게 양자로 보냄. 이쪽은 천우 포대희로 활동 중

첫 부인 사별 후 운주대협극 뒤에서 노래 부르던 두 번째 부인 사이의 황립강씨과 따님은 현재 천지 금광포대희에서 활약 중

이 쪽은 황색 언론의 가십으로 나온 듯함. 제목은 사염문 VS소환진 ㅋㅋㅋ 

 

TV포대희

 

1960년대 초반에는 영화관에서 포대희가 상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야외금광포대희는 농촌지역의 주된 오락으로 자리 잡았다. TV시대가 도래한 1962년 당시 타이완에서 유일하게 TV 방송을 한 타이완전시공사가 이천록 역완연장중극단(亦宛然掌中劇団)’의 삼국지를 방송했다. 19654월에는 명허실장중희반 (明虚実掌中戯班)의 북경어 구백 수선궁주 (水仙宮主)를 방영하여 TV를 위해 제작된 포대희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주천에 의해 시작된 TV포대희는 금광극의 황준웅에 의해 더욱 발전한다.

1960년대 초반 황해대는 포대희예능을 아들인 황준경 黄俊卿(1927-)과 황준웅에게 계승한다. 황준웅은 인형, 음악, 무대 효과에 힘을 쏟아 새로운 내용의 극을 만들어 냈다. 1970312일 황준웅이 이끄는 진오주극단(真五洲劇団)은 실내극으로 상연되던 운주대유협을 처음으로 TV에서 방송했다. 신선한 음악과 무대 효과로 인해 인기 방송이 되어 방송 회수는 583회를 넘어선다. 타이완에서 97%라는 최고시청율을 기록해 TV방송이 학생이나 사회인의 무단결석, 결근을 초래해 1974616일 정상적인 사회활동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한 TV 포대희 방송 금지와 같은 사회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사진: 70년대 사회현상을 몰고 온 운주대유협    


영화 산업과 전문 채널



1980년대 후반 타이완 정부의 외국 미디어 규제 완화에 의해 외국 오락 문화가 유입되면서 타이완 포대희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관객이 감소하면서 후장을 맡는 전문집단은 상영 기회를 잃고 경영 적자에 빠져 전성기에 천 개가 넘던 야외포대희 극단이 300여 개로 줄어들고

그 중에서도 실제로 상연을 하는 극단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일부는 학교나 지역에 밀착된 활동을 계속하면서 전통포대희 보존을 위해 노력하며 특히 이천록과 종임벽의 업적이 크다. 신흥각 종임벽은 대학 학과에 포대희기능을 설립하기도 했다.

타이완 전통포대희 극단과 관객은 대폭으로 감소했지만 TV포대희는 1980년대 큰 진보를 이룬다. 1988TV방송의 발전을 이어받은 황문택과 황강화 형제는 미지오록영대공사 (美地塢録影帶公司)를 통해 렌탈 비디오 시장에 뛰어들어 벽력계열포대희를 중심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이 극단은 렌탈 비디오를 통해 백만 관객 시장을 만들어 내 전 타이완 렌탈 비디오의 10%를 차지하게 된다.



사진: 벽력 포대희 영상물... 실은 여기서 더 늘었음...많이많이 늘었음. 오호호..ㅠㅠㅠ


1993년 벽력시리즈는 포대희 방송을 내보내는 전문 채널 벽력위성전시태 (霹靂衛星電視台- 현 벽력台灣台)로 발전해 나간다. 경영방식은 렌탈용 포대희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TV로 방영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다양한 미디어로 진출한 포대희는 1997년 영화화 된 성석전설로 타이완 뿐 아니라 일본, 미국 등 많은 나라로 진출했다.



사진: 성석전설 한국어판 DVD 표지 


전통적인 포대희는 침체되었지만 제작 레벨을 높여 비디오와 TV화를 통해 새로운 관객을 모아 2005년 타이완 TV포대희 시장은 4000만불(US) 이상의 시장으로 성장하며 100만명 이상의 시청자를 확보하고 케이블 TV채널은 350만 가구 시청 이상으로 성장했다. 또한 포대희 관련 상품의 판매도 증가하고 동인지나 코스프레 등 동호인에 의한 서브컬쳐로 성장했다.

 


이제 관련 사이트들과 극단 만 정리하면 끝인데 링크 끊긴게 더 많음...

아무튼... 전부터 이걸 번역해야지 마음 먹었었는데 해놓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함. 일본어 위키 작성작 분 누구신지 모르지만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거 누가 퍼가긴 할까 싶지만 그래도 행여나 퍼가거나 인용하신다면  일주일 새벽 꼬박 두 세시간 로동한 거 좀 봐주셔서 인용 출처랑 이곳 링크라도 남겨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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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파

 

17세기 복건성에서 시작된 포대희이지만 그 후에는 복건에서 타이완으로 그 지역이 넓어졌으며 각 시대마다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기 때문에 유파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

전통적인 포대희 유파는 음악에 의해 분류한다. 남관南管(타이완 전통 기악 종류)을 사용하는 유파를 남파포대희 (남관포대희), 광동의 조주(潮調: 광동지역의 음악 형식)를 사용하는 유파를 조주포대희(潮調布袋劇), 북관(北管 타이완 전통 기악 종류)을 사용하는 북파포대희(北管布袋劇)로 칭한다.

20세기 이후 타이완에서는 장주의 북관문무극에 경극에서 쓰이는 나고(鑼鼓)를 사용한 외강포대희 (外江布袋劇)와 가자희 (歌仔劇: 타이완 오페라)의 노래를 사용한 가자포대희(歌仔調布袋劇)가 탄생하게 된다. 후자는 현재 타이완에서 장주로 역수입되었다.



사진) 나고 출처는 이 곳. 

http://big5.huaxia.com/zhsx/sjfq/fwzwhyc/2009/04/1388283.html

 

또한 포대희를 지역에 따라 분류해 보면 문희(文戯)를 특징으로 하는 남파는 주천에서 성행했다. 음악은 남관악을 채용하고 唱腔(창강 중국 전통 노래 곡조)도 남조를 채용했으며 당대부터 전해지는 이원극 (梨園劇: 중국 전통 연극 형식)의 영향도 받았다. 장주포대희는 광동 조주(潮州)와 인접한 일부 지역에서 조주포대희가 상연되는 것 외에는 북관악을 사용한 북관포대희가 대부분이다. 북파는 무희(무를 다룬 극)를 잘 다루며 창강은 북조로 한조(漢調),곤강 (昆腔), 경조 (京調) 등이 사용되며 경극의 영향도 받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포대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다른 문화 매체와 융합하여 남북양파의 분류가 점점 불명확하게 되었다.

 

타이완에서는 남북양파 포대희가 모두 성행했다. 남파의 극 내용은 주천에서 유행하는 연극 종류와 비슷한 것이 많았지만 타이완에 전해진 이후에는 백자 (白字)라고 칭해지게 되었다.

이 스타일의 포대희는 극단 구성원은 타이완 중부 운림현의 태서(台西), 맥료 (麥寮), 포충 (褒忠), 동세 (東勢), 사호 (四湖) 등의 출신이 많고 타이완 북부에서 특히 인기가 있다.

북파는 타이완에서는 난탄(乱弾)이라고 부르며 장천을 그 기원으로 하는 무희를 중심으로 한다. 이쪽 극단 구성원은 운림현 두륙(斗六), 서라 (西螺), 두남 (斗南), 호미 (虎尾), 고갱 (古坑), 이륜 (二崙) 등의 출신이 많으며 타이완 남부에서 인기가 있다. 이 외에 타이완 포대희는 등장인물에 의한 분류도 가능하다. 이를 각파(閣派), 원파 (園派)라 나누는데 황해대가 원파의 대표 인물이며 오주원(五洲園 역주: 황해대 선생이 일제강점기동안 이끈 오주원인형극단)을 거쳐 제자들에 의해 벽력포대희로 발전하게 된다.

 

 유파명칭  

 유파 별칭

 유행 지역

 악기 곡조

 단원 출신 지역

 남파포대희

 남관포대희

 주천,타이완북부

 남관

 천주, 운림현

 북파포대희

 북관포대희

 장천타이완 중남부

 북관

 장주, 운림현

 조주포대희

 조천포대희

 광동조주,장주 동산

 광동 주조

 광동복건

 외강포대희

 경극포대희

 장주, 타이완 타이페이

 북관경극 나고

 장주타이페이

 가자조포대희

 

 장주,  타이완

 가자조

 장주타이완



각 지역에서 발전

 

문헌에는 양병린이 포대희의 시초라고 전해지지만 역사적인 사실로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다.

하지만 포대희와 주천의 괴뢰극문화가 (傀儡劇 역주: 실로 하는 전통 인형극의 한 형식.일종의 마리오네트) 서로 관련이 있음은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복건지역 포대희 발전 과정에는 주천포대희의 영향이 있었음이 널리 인정되기 때문에 천주가 포대희의 발상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오랜 전승과정 중에 주천포대희는 인형전통예술의 한 분파가 되어 이 지역 인형공예도 괴뢰(실 인형)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이에 반해 장천 지역과 타이완에서는 천주를 능가하는 발전을 보인다. 1950년 이후 타이완에서는 전통포대극 개량이 붐을 이루어 장주 양 지역을 넘어서는 예능으로 발전하게 된다.

 

천주 泉州

 

문헌에 의하면 1730년부터 1760년 동안 천주지역에 포대희가 상당히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천주포대희는 인형이나 무대장치, 음악 등이 괴뢰희의 강한 영향을 받아 극 내용도 신에게 감사하거나, 받아들이거나, 제사지내는 내용 등이 행해졌다. 1798년 기록에 남은 중국 최초의 전문 포대희극단으로 금영성우극단 (金永成偶劇団)이 탄생하여 기존 괴뢰조를 발전시키고 여기에 문희를 섞어 정밀한 인형과 천주 특유의 연출을 가한 남조포대희가 탄생하게 된다.


사진 : 천주 지도 저 지역 오른쪽이 바로 타이페이 섬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천주남조포대희는 큰 성황을 이룬다. 이 시기 중국 각지에 포대희가 널리 퍼지고 괴뢰극에서 비롯된 내용 외에 인형조작 기술을 중요시한 이원포대희가 탄생한 것이 인기를 얻은 이유 중 하나이다. 20세기 초반 이원포대희에서 다시 노래를 중시한 농저극 (籠底劇)이 탄생한다. 하지만 대본의 창의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민간에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후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음악과 남관을 사용하는 등 개량을 거듭하고 독자적인 문희도 접목하지만 타이완포대희나 장천포대희에 비교해 시대에 뒤처지게 되어 포대희를 대표하는 지위를 잃고 만다.

20세기가 되면서 중국정부의 주도로 민간예능 보존과 육성이 장려된다. 이 결과 1953년에 전문 극단인 진강장중목우극단 (晋江掌中木偶劇団)이 탄생했다



사진: 진강장중목우극단의 오피셜 이미지. 


이 극단은 남관과 이원을 접목시켜 백룡공주(白龍公主), 오리장 (五裏長) (무지개) 등의 극이 중국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상연되기도 했다. 하지만 문화혁명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1980년대 이후 이 상황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또한 포대희 외에도 이 지역 인형 조각공예도 매우 유명하며 특히 강가주 (江加走 1871-1954) 선생의 작품은 현재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진: 강가주 선생님의 목우 머리들. 포스가 장난이 아님. 





이 부분은 내용도 어렵고 예의 전통 에술 용어도 드글드글...ㅠㅠ

재미는 있다. 저 진강장중목우 극단은 오피셜 사이트도 있다. 

http://www.jjmojt.com/index.html

이곳. 해외 공연도 많이 하고 복건성에서 팍팍 밀어주는 듯하다....마는 그놈의 문화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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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포대희에서 사용되는 인형의 기본 구조는 몸체 (身架), 의복, 투구 (머리장식 일습)으로 분류된다. 몸체는 목제의 두부, 천으로 만든 신체 부분, 목제의 손, 천으로 만든 다리, 목제 신발을 포함하며 전통적인 인형의 크기는 약 80cm 정도이다. (역주: 앞부분에서는 30cm라고 했음. 작성자가 달라서 오는 오류로 보임)





사진: ㅋㅋ 현대 포대희 인형의 손 부분 ㅋㅋㅋ 숙련된 조교 엽소채  킁의 손. 



종류에 따라 분류하면 포대희의 역에 의해 포대희 인형도 생, , 정 크게 셋으로 분류되고 이를 다시 출생(出生), 화검 (花臉), , 신도, 정괴, 잡각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인형사가 일담롱(一擔籠)이라 속칭하는 이러한 인형은 전통포대희에서는 포대희 하나를 상연할 때 이 6개의 분류 아래 각종 80종류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인형 머리는 과거에는 중국 천주에서 많이 제작되었다. 1920년대 이후 타이완에서 틀을 사용한 두부 (새옥락 賽璐珞) 제작이 시도되었지만 여전히 천주에서 수입한 당산두(唐山頭: 당산두가 고유명사인지 알머리 같은 보통명사인지 찾다가 포기..)가 주로 사용되었다. 당산두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도문두(塗門頭)와 화원두(花園頭)가 있다. 도문두는 주로 천주 도문거리의 주면(周冕)을 칭하며 타이완에서는 도두(塗頭)라 불리며 화검 종류가 특히 유명하다.

화원두는 천주 환산향 화원(지명임)의 목재로 생산되며 생, 단 등을 만든다. 천주산의 머리 재료료 사용되는 목재 대부분은 은행나무나 향나무가 사용된다. 반대로 타이완에서는 오동나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제작 과정은 초벌 깎기, 연마, 얇은 종이를 바른 후 베이스가 되는 토지(土底)라 부르는 것을 바르고 표면에 파운데이션 처리를 한 후 얼굴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머리와 수염을 붙인다.

 

각본

 

포대희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형과 음악에 의해 전승되어 많은 각본이 구전되거나 이야기 꾼이 출연자에게 읊어 준 내용에 따랐기 때문에 책으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당시 구전으로 전해지던 내용으로는 삼국지연의, 서유기, 봉신연의, 수호지 등이 주를 이루었다.

1945년 이후 장천 지역 (漳泉地区)의 포대희가 쇠퇴하면서 타이완포대희만 발전을 계속하게 된다. 타이완포대희 장인 황해대(黄海岱)는 많은 제자를 모집하고 기술 전승을 위해 직접 오호전청룡 (五虎戦青龍), 대당오호장 (大唐五虎将), 삼문가(三門街), 곤도일사(昆島逸史), 비도유서 (秘道遺書)의 각본을 문서로 남겼다. 또한 1960년대 황준웅 (黄俊雄)이 저명한 포대희작품인 운주대유협 (雲州大儒侠) 각본을 황해대가 충효의용전(伝忠孝義勇伝)을 완성했다.



사진: 황준웅 포대희 운주대유협 사염문.장경인 

이 운주대유협에서 파생된 스토리라인은 천지회사금광포대희로 현재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장주의 장주목우희단(漳州木偶劇団)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 이후 아동극 원본을 가지고 각본을 만들었으며 타이완에서도 시민애호가들 사이에서 이 방식이 시도되었다.

그렇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전통 각본과 즉흥적인 타이완어 구백이 포대희의 큰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

 

 

포대희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면 무림구사 (武林旧事), 동경몽화록 (東京夢華録) 등의 고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송대 궁정에서 행해진 연회에서 벌어지는 여흥 중에 이미 인형극이 있었고 현재 전해지는 포대희와 내용은 다르지만 인형극이 주천을 그 발상지로 삼는다는 근가가 되는 고사로 널리 전해진다.

명대에 이르러 과거에 몇 번이고 탈락한 양병린 (梁炳麟)이 복건성 선유현 유현구리호 (福建省仙游県九鯉湖)에 있는 선공묘에 급제를 기원할 때 꿈속에 한 노인이 양병린의 손에 공명귀장상 (功名帰掌上 공명은 손바닥 위로 돌아온다) 이라는 글을 썼다. 이를 길조로 삼은 양병린이었지만 시험에 또 떨어졌다. 실망한 양병린은 인형극을 배우기 시작하고 인형 속에 손을 넣는 방식을 접목했다. 더불어 문학에 조예가 깊고 각종 패관야사를 채용한 이야기가 관객을 매료시켜 여기서부터 포대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외에 명대 융경(1567-1572)연간에 복건성 용계현(龍渓県)에서 과거에 낙방한 손교孫巧 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사진: 양병린으로 검색해서 나온 이미지. 공명은 손바닥위에 그 고사를 일러스트로 그린 듯한테 출처를 알 수 없다. 문제시 나중에 삭제함. 



17세기 중반 포대희는 상당한 인기를 끌며 견단극(肩担劇) 스타일을 갖추게 된다. 견단극은 간이 무대를 설치하고 무대 아래에 자리잡은 인형사가 위에 있는 인형을 조작하는 예능이다. 18세기에 이르면 여러 지역에서 제각각 직업 포대희 극단이 나타나 야외에서 하는 야외극과 실내에서 하는 실내극으로 분류되었다. 이 중 야외극은 각 지방을 돌면서 때에 따라서는 각종 신에게 감사하는 예능으로 변화하기고 하면서 간단한 무대장치와 소수의 출연자들에 의해 상연되었다.

실내극은 18세기에 등장하지만 가장 크게 유행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실내극은 화려한 무대장치와 야외극에 비해 많은 수의 인원이 연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실내극은 다른 실내 극 종류와 마찬가지로 무대장치를 배치하고 사람대신 인형을 사용한다. 때문에 경극이나 영화 연출 효과와 중복되기 때문에 실내극은 점점 쇠퇴하여 1980년대에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복건. 타이완에서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 실내극 방식은 1960년대 1960년대 TV포대희라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TV세트 안에서 포대희를 연출하는 것으로 타이완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케이블 TVDVD, 영화 등의 매체로 발전하게 된다.

 


포대희 역사 부분은 옛날 이야기 같아서 재미있다.ㅋㅋ 과거에 낙방한 선비님.ㅋㅋ 로또 번호 찍어 주세요. 하니까 고용노동청 전화번호 찍어 준거잖아.ㅋㅋㅋㅋ.저 공명은 손안에... 글도 꽤 멋진데 나중에 맘에 드는 사람 만나면 손을 덥썩 잡고 손바닥에 써줘야 겠다. ㅎㅎ 아무튼 한 반쯤 온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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